기억의 전당
불빛 속에 스며든 시간들

이곳에는 기억들이 산다. 꽤 오래전부터, 아무도 살지 않던 빈터였을 때부터. 바람만 불고 해만 뜨고 지던 그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기억할까.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 물이 땅을 적시며 풀을 키우고 나무를 자라게 했다. 자연이 스스로를 그려나가던 시절. 그런 기억들이 여기 차곡차곡 쌓여 있다. 산이 푸르러지고 물이 맑아지던 그 시절의 기억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한다.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텃밭을 일구던 소리들까지. 그렇게 이곳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맑게 만들었다. 이 집이 지어졌을 때의 기억은 더욱 또렷하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방이 몇 개 있는 집. 하지만 해가 지면 호롱불을 켰다. 그 불빛이 창호지를 통해 은은하게 새어 나오던 기억이 아직도 이 집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한 부부의 기억이 이 집에 가장 깊이 스며 있다. 아내는 늘 앞치마를 두르고 다녔다. 손님이 오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와서 맞았다. “어서 오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그런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부엌에서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만들던 소리들. 늘 무언가 끓고 썰고 다지던 소리들이 이 집의 기억이 되었다.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나던 그 따뜻함도 여기 그대로 있다.
아이들의 기억들은 마당 곳곳에 흩어져 있다. 뛰어다니며 놀던 기억들. 봄에 개나리와 진달래를 보며 좋아하던 기억, 여름 처마 밑에서 수박을 먹으며 빗소리를 듣던 기억. 나무 그늘에서 매미 소리 들으며 낮잠을 자던 기억, 가을에 감을 따서 먹으며 입 주변이 온통 주홍빛이 되던 기억, 겨울에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들이 철마다 돌아와 이 집을 찾는다. 아이들은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가족을 위해 바삐 일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직 일흔도 안 된 나이였다. 그래도 그다음 날도 밥을 지었다. 호롱불을 켰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형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바삐 일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호롱불은 아침이 되어 해가 뜨고서야 꺼지기 일쑤였다. 동생도 형을 도왔다. 서툴게 시작해서 점점 늘어가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데 형이 어느 해부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기침이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병원에 갔더니 폐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마흔일곱. 아직 젊은 나이였다. 그래도 그날 저녁에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호롱불을 켰다. 동생이 모든 것을 떠안았다. 하루아침에 형이 하던 일을 다 해야 했다. 그래도 밥은 지어야 했다.

세상일이 늘 순조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사업이 잘 되나 싶었는데 큰 사기를 당했다. 힘들게 이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아침이 되면 일어났다. 저녁이 되면 불을 켰다. 외국 사람들이 와서 이 집을 빼앗으려 했다. 엄청난 돈을 가져가면서도 모자라다고 했다. 그래도 가족들은 한 상에 앉았다.
어려움이 생기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던 기억들이 있다. 이것저것 해보고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며 하나씩 늘려가던 기억들이 차례차례 쌓였다. 세월이 지나 젊은 세대가 새로운 이름을 걸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던 기억도 여기 있다.

무엇보다 이 집에는 꺼지지 않던 불의 기억이 있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켜지던 호롱불, 끊임없이 피어오르던 아궁이 온기의 기억이다. 아버지와 형이 세상을 떠나도, 돈이 사라져도, 남들이 빼앗으려 해도 그 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그 따뜻함이 모든 일의 뿌리가 되었다. 바깥에서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집에 오면 따뜻했다.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내일 할 일을 의논하던 기억들이 여기에 있다.
그런 식으로 이 집은 기억의 전당이 되었다. 아픈 기억도, 슬픈 기억도, 기쁜 기억도 모두 이곳에서 살아간다.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따뜻한 사람들의 기억들과 더불어서.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기억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는 남아 있다. 이 집처럼.